삼정의 문란
19세기 조선 왕조의 국가 재정 수입의 3대 요소로,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이 있었다. 이것을 통틀어 삼정이라 한다. 즉 삼정의 문란이란, 바로 이 제도가 문란해져 올바르게 운용되지 않았던 현상을 말한다.
전정(田政)
농토에서 거둬들이는 여러 가지 세금 행정. 농토에는 여러 가지 명목의 세금이 부과됐는데, 그 값은 농토 1결당 20말 정도에 불과했다. 농토 1결에 20말의 세금은 수확량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거라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 농민들의 부담이 매우 컸던 것은, 관리들이 여기에 여러 가지 ㅈ같은 명목을 덧붙여 규정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기 때문. 그리하여 실제 부담하는 세금은 본래의 규정된 양보다 몇 배가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관리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온갖 비리를 저질러 농민을 괴롭혔고 이에 따라 전정은 매우 문란해졌다.
군포(軍布)
조선시대 때 병역 의무자인 양인 남정(*男丁: 16세 이상 ~ 60세 이하)이 현역 복무에 나가지 않는 대신에 부담했던 세금
군정(軍政)
농민 장정으로부터 군포를 거두어들이는 행정을 말한다. 균역법 실시 후 장정은 1년에 군포 1필씩을 바쳤는데, 이 제도마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부과되는 폐단이 나타났다.
게다가 신분제의 동요로 군역 부담의 의무를 진 농민이 줄어들어 남아 있는 농민의 부담이 더 늘어났다. 관리들은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으기 위해 더 많은 군포를 거둬들여 그 폐단은 더욱 커졌다.
관리새끼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 몫의 군포를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일가 친척이나 이웃 사람에게서 거둬들이는 등 여러 가지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던 것. 이러한 부정 행위로 군정의 폐단도 심했다.
환곡(還穀)
삼국시대~조선시대의 사회보장제도이자 구휼제도, 서민금융제도였다. 봄에 농민들에게 관청의 곡식을 빌려줬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이자는 원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고리대의 구실을 했다. 이로써 환곡은 일종의 세금과 같이 되고 말았다. 관리들은 이자 수입을 늘리고 재물을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 불법을 저질렀는데, 환곡의 폐해는 삼정 중에서 가장 심했다.
관리들은 필요 이상의 양을 강제로 빌려 주기도 하고, 겨를 섞어서 1가마니를 2가마니로 늘려 빌려 주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들을 괴롭혔다.
>> 이렇듯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을 괴롭혔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했다. 이에 국가에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암행 어사를 파견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써도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오랜 기간의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 정부의 명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탐관 오리들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
암행 어사(暗行御史)
왕의 특명으로 지방 군⋅현에 파견되어, 변복을 한 채 몰래 다니며 수령의 잘잘못과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 임무인 특별 감찰관.
암행 어사가 일반 어사와 다른 점은 국왕이 친히 임명하는 데다 그 임명과 행동이 비밀에 부쳐진다는 거다. 왕은 전국의 군⋅현 명칭을 기입한 참댓가지가 들어 있는 대나무 통에서 암행 시찰할 군⋅현을 추첨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수령의 불법이나 비행의 혐의가 있는 군⋅현의 경우에는 추첨과 관계 없이 암행 어사가 파견되기도 했다. 왕은 암행 어사를 임명할 때 역마 사용권을 부여하는 증패인 마패를 지급했다.
마패는 왕의 명령을 받은 관리임을 증명하는 증패로서, 창고 문을 봉하거나 문서에 날인할 때 직인 대신 사용됐다. 암행 어사는 수령이나 지방 토호의 가렴주구(*苛斂誅求 가렴주구는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는 것)를 탐지하려고 허름한 옷으로 변장하고 걸식을 하면서 정찰을 했다.
정찰을 마친 암행 어사는 출두를 하였는데, 역졸들이 관가의 문을 두드리면서 출두를 외치면 암행 어사는 관가로 행차하여 동헌 대청에 자리했다.
암행 어사는 공문서를 검열하고 수령의 범죄를 적발했다. 불법을 저지른 수령은 체포, 구금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 관인을 압수했다. 관가의 창고를 검열하여 불법이 있으면 창고 문을 봉하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 수령이나 토호들의 불법과 비행으로 지방 행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암행 어사가 빈번히 파견되었다.
대중들에겐 암행어사로 '어사 박문수'가 가장 유명하다.
▶ 박문수 자세히 더 알아보기
안핵어사(按覈御史)
암행어사와 이름과 하는 일이 비슷한데, 안핵어사는 '특정한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하기 위해 왕명(王命)으로 지방에 파견되는 관원을 말한다.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조선후기 철종 때 삼정의 문란, 임술 농민봉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삼정이정청을 설치한 이후, 철종은 제도 개혁에 대한 방책을 구하려는 의도로 6월 12일부터 약 75일간 무려 수백 명의 관리와 유생들의 상소문을 받았다.
상소문을 올린 사람은 중앙 관료로부터 지방의 이름 없는 유생들까지 다양한 계층들이었다고. 그만큼 당시 삼정 문제는 모든 백성들이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였고, 민생과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사안이었다.
하지만 삼정이정청은 임시 관청으로 만든거라 3개월만 운영되고 폐지되었다. 그러니 삼정의 문란이 해결이 될리가 없었고 이후에도 다양한 민란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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